그렇다면 다음은,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는 신라가 7세기 삼국을 통일한 후 시간이 지나며 약해진 권력을 배경으로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까지 다시 세 나라가 대립했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시대는 크게 태봉 → 고려, 후백제, 그리고 신라가 서로 맞서는 가운데 각지에서 지방 호족들이 난립했던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발해가 이 시기에 존재했기 때문에 ‘후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지만, 당시 신라의 외교력은 발해를 압도하여 발해가 ‘고려’라는 국호를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통일 주장이 전적으로 실체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이후, 그 국호를 다시 사용한 나라는 궁예의 태봉과 왕건의 고려가 처음이었으므로 후삼국시대라는 구분이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냉정히 보자면, 발해는 한반도 내에 수도를 둔 적이 없었고, 통일신라에 비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낮았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에 치중한 나머지 이 시기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질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고구려 후계국을 자처한 고려나 그 전신인 태봉-마진이 발해와는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시기적으로는 889년부터 936년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889년은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해이며, 936년은 고려가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에 승리하여 통일을 이룬 해입니다.

이 시기 국가들의 이름이 삼국시대와 같은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지 2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삼국의 유민의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일 신라 200년 동안 유민 의식의 표출 시도가 거의 없었으므로, 반란 후에 이름만 빌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궁예와 견훤은 먼저 세력을 만든 후 몇 년이 지나 백제왕, 고구려왕을 자칭했기 때문에 그들이 처음부터 백제와 고구려 부활을 목표로 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및 백제 영역에는 여전히 유민의식이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사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통일신라 시기 황해도나 패서 지역의 호족은 실제로 고구려계 호족들이었으며, 신라가 직접 지배하지 못하고 간접 지배로 만족했습니다. 옛 백제 지역에서도 유민 의식이 확인되며, 9세기 즈음 신라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백제식 불상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세계사적으로도 이런 사례는 흔합니다. 중동이나 유럽에서는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정체성을 유지한 민족 집단이 많습니다.

지방에서의 봉기 시, 망국의 국호를 쓰려면 유민 의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지방 세력가가 이용하기 좋은 명분이지만, 이런 시도는 공감대와 사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견훤이 건국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의자왕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습니다. 궁예도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주장하며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고구려와 백제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없었지만, 그들이 차지한 땅의 사람들은 유민 의식이 있었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여러 정책으로 한반도 의식을 통합하려 했지만, 여전히 통합이 부족하여 삼국 공통의 시조는 남북국시대 내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삼국 공통의 시조인 단군을 강조한 것은 고려 시대부터입니다.

통일신라가 성립한 후, 신라는 220년 이상 전성기를 누렸지만, 말기로 접어들면서 진골 귀족들 간의 왕위쟁탈전으로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전국의 지방관과 호족들은 반란을 일으킬 욕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9세기 후반, 후삼국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에도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신라의 금군이 신속히 출진해 단기간에 진압했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반란의 불씨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성여왕 시대에는 지방 통제력 약화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국고가 텅 비었고, 관리를 보내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했지만, 오히려 농민들이 격분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원종·애노의 난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라 정부는 반란군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고, 지방 세력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점차 국가 체계를 갖추고 옛 삼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통성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 궁예가 세운 태봉, 그리고 신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신라 김씨 왕조는 헌강왕 때만 해도 안정기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동생 정강왕이 왕위에 오르고 1년 만에 죽자, 여동생 진성여왕이 올랐습니다. 그러나 진성여왕 때부터 지방 반란을 통제하지 못했고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진성여왕은 후계자가 없어 헌강왕의 서자 효공왕을 왕위에 올렸지만, 효공왕도 후사가 없어 박씨 왕조로 교체되었고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덕왕도 5년 만에 죽고, 아들 경명왕이 계위했으며, 경명왕 2년에 김씨의 반격이 있었지만 진압당했습니다. 경명왕도 7년 만에 죽어 경애왕이 올랐는데, 후백제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살해되고 김씨가 왕위를 되찾았습니다.

경주의 신라인들은 지방 통제력을 잃었지만 200년 이상의 통치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통제력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경북 동쪽 절반 일대에서는 세금 징수와 인력 징발 등 통제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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