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싶은 역사,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기간으로,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서 지배되었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대한제국을 합병하고, 한반도와 부속도서에 대한 공식 명칭을 ‘조선(朝鮮)’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일본의 통치 체제와 주요 사건들이 다양한 양상을 띄었습니다. 특히 통치의 성격이 약 10년 주기로 세차례 변경되었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3분법이라고 합니다. 제1기는 무단통치 및 헌병경찰통치로, 제2기는 문화통치 및 민족분열통치로, 제3기는 황국신민화통치 및 민족말살통치로 구분됩니다.

일제강점기를 지칭하는 명칭에는 다양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는 표준 국어 사전에 등재된 명칭으로 널리 사용되며, ‘대일항쟁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각을 반영한 표현으로 국회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일제시대’는 회화적인 표현으로서 널리 쓰였으며, ‘일본제국주의강제점령기’는 일본의 강제적인 통치를 강조한 명칭입니다. 그 외에도 ‘왜정’, ‘왜정시대’, ‘일제침략기’ 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한국 내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지칭하는 명칭이 다소 다르게 사용되며, 이는 역사적·정치적 맥락과 해석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제국의 대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협상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양국의 황제와 천황이 직접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며, 일본 제국은 대리인을 보냈고 대한제국의 황제는 직접 대면하지 않았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대한제국의 모든 영토를 강제로 병합하고,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가로 격하시켜 일본 황실에 편입시켰습니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대에는 일제가 무단통치를 실시하여 헌병경찰이 치안업무를 담당하였고, 이는 조선인의 기본권을 철저히 억압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통치는 조선인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의 근대화 부족으로 인해 식민지배를 서두르면서 발생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자급자족 체제를 구축하고자 공포정치, 즉 무단통치를 실행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일본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정치적 활동이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극소수의 지주와 친일파만이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에 참여할 수 있었고, 조선태형령을 통해 태형이 부활했습니다. 1920년대에는 하라 다카시 내각이 내지연장주의에 따라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는 실패했습니다.

한반도는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노동력이 값싼 지역이었으며, 일제는 이를 활용하여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과 원료의 공급기지로 재편하려 했습니다. 또한, 조선의 관세 자주권을 박탈하고 일본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법령을 시행했습니다. 국유지 조사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소유권 제도를 확립했지만, 이는 체계적인 수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식민지 편입과 동시에 일본은 철도, 도로, 항만 건설에 재정의 절반을 투입하고 관개시설을 개보수하여 농업 증산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헌병경찰 제도에 재정의 30~40%를 투입하는 등 통치 체제가 우선시되었기 때문에 농업 정책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조선물산공진회 같은 교화정책을 통해 업적을 날조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군은 조선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하고 아편과 히로뽕을 이용해 매춘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조선어는 격하되었고 일본어가 ‘국어’로 명칭이 바뀌면서 조선의 언어와 문화가 억압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조선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어두운 시기로, 조선인의 기본권과 자주권이 철저히 무시되고 억압받았던 시대입니다.

1920년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조선 민중들 사이에 퍼지면서 3.1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일제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도 맞물리며 무단통치 시기의 종식을 가져왔습니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하며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3·1 운동에 충격을 받은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에 대한 가혹한 정책을 완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문관도 조선총독이 될 수 있음을 내걸었으며, 헌병 대신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겉치레에 불과했습니다. 1920년 경찰관서 수는 1918년보다 3.6배, 경찰관 수는 3.4배 증가했으며, 경찰 예산도 3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고등경찰제도를 신설해 조선인 사회를 감시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회사령을 철폐해 조선인의 사업 규제를 완화하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일본 기업의 조선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이 시기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조선인 언론사도 여럿 창간되었습니다.

문화통치의 목적은 조선인들의 사회문화적 기반을 일본으로 흡수하고,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언론과 사회 운동이 허용되었지만, 검열과 요시찰 제도를 통해 여전히 제한하고 탄압했습니다. 또한, ‘자치론’이라는 떡밥을 내걸어 친일 지식인들을 육성했습니다. 경성제국대학 등 교육 시설을 정비하고 제한된 인원에게만 교육을 제공하며 친일적 요소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했습니다.

교육 기회 확장은 일제가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전국적으로 많은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사립학교 개설은 규제되었고 공립학교만 늘리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초등교육이 보편화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보통학교 입학시험이 생겨났고, 학교의 수가 충분하지 않아 많은 학생이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중등학교와 고등학교 설립은 극단적으로 억제되었으며, 고등교육기관도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일제는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를 보고 느낀 점을 바탕으로 식민지 내에서 교육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력에게만 선택적으로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경성제국대학은 식민통치에 필요한 법학과 의학을 교육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고, 태평양전쟁 이후에야 이공학부를 개설했습니다.

이 시기는 3.1 운동의 영향으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습니다. 김원봉 단장이 지휘한 의열단은 여러 차례 폭탄 투척을 했고, 상해임시정부와 흥사단, 국민회 등이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공산주의자와 반대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지방선거는 형식적이었고 문관 출신 총독은 한 번도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친일파 양성 정책을 통해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타협적 인사들을 지원하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갈등을 빚게 했습니다. 이 갈등 속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를 창립했습니다.

이 시기는 조선인의 세계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반도는 비록 식민지였지만 세계와의 교류는 활발했고, 조선인들의 세계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사회주의 사상과 반제국주의 사상이 수입되었고, KAPF와 같은 사회주의 문학 단체도 활동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파투쟁으로 여러 차례 와해와 재창당을 반복했습니다.

1930년대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이 극대화되던 시기입니다. 1932년 일본군이 최초로 위안부 제도를 도입했으며, 같은 해 만주국이 수립되었습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확장은 국외 독립운동가들에게 매우 가혹한 시기를 초래했습니다.

군국주의 특수 상황 속에서 유한양행과 같은 민족자본의 성장 기회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농촌진흥운동과 전시체제를 준비하며 남면북양 정책을 실시했고, 이로 인해 농업생산량과 일본으로의 쌀 수출량이 증가했습니다. 이 시기는 주식투자와 회사 설립이 활발했던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매우 커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했고, 문맹률도 높아 하층민들에게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은 한반도 내부와 완전히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1919년 수립된 상해임시정부는 1932년 이봉창 의사 의거와 제1차 상하이 사변, 윤봉길 의사 의거로 인해 항저우(1932)와 난징(1937)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많은 조선인들은 임시정부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해외 무장투쟁 상황은 더 열악했습니다. 1930년대 초반, 만주사변 시기 지청천과 양세봉 등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졌습니다. 만주국 건국 이후 무장투쟁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이재유의 경성 트로이카를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을 벌였습니다.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소작쟁의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쟁의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40년 공업 생산액의 55.9%는 북한에서, 44.1%는 남한에서 생산되었으며, 일본 치하의 산업비중은 서비스업을 제외할 때 농업이 42.8%, 공업이 39.1%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무렵, 일본제국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며 전시체제로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에 초등학교 과정을 2년으로 압축한 형태의 간이학교가 생겼습니다.

1940년대

194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양면전쟁과 총력전의 특성상 일본군의 전력이 부족해지자, 일본은 외지와 내지를 완전히 통합하는 강압적인 민족말살정책을 강제로 시행했습니다. 본래 일본의 통치 목적은 점진적인 영구 병합이었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인해 이 정책이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일본 기업의 활발한 진출과 함께 한국어 사용 매체 금지, 창씨개명, 징병제 도입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많은 조선 지식인과 지배계층이 친일로 전향하고 있었기에, 한민족은 점진적으로 다가오던 영구 병합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문화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물자 부족과 한국어 매체 금지로 강제 폐간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인해 일제는 물자와 인력 공출을 강화했고,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으로 조선 민중은 유례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강제징용과 징병제도 실시되었고, 전쟁의 성과가 나빠지자 일제는 더욱더 물자 공출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일제는 조선에서 공출제를 실시했습니다. 철도 선로를 철거하고, 금속으로 된 물건들을 빼앗아갔습니다.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공출된 물자가 일본 본토로 이송되지 못해 시장과 유통 체계가 마비되는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시기는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1930년대부터 일제의 탄압이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1944년에 결성된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이 시기 몇 안 되는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였습니다. 경성 부민관 폭파사건과 대구 학병 거부 의거, 평양 학병 거부 의거 등도 이 시기 드문 독립운동에 속합니다.

일본 제국은 자체적인 모순과 한계로 인해 문제를 맞이했으며, 조선에서도 독립 요구와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일본 제국의 과부하가 심화되었고, 조선인 사회는 전시체제로 인한 피폐함과 붕괴 양상을 보였습니다. 일제는 1945년 조선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을 검토했으나, 일본이 항복하면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미군의 공습도 한반도까지 다다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소련군이 만주를 넘어 북한 일부 지역에 진격하고,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한국은 8.15 광복을 맞았고, 일제 치하에서 비밀 결사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해 치안과 행정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행정권과 치안권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았고,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을 봉쇄했습니다. 결국 1945년 9월 9일,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끝났습니다. 잠시 동안의 신탁 통치를 거쳐 한반도에는 자주적인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해방 직후에도 일제의 수뇌부는 조선에 가짜 화폐를 뿌리며 인플레를 일으키는 등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한국은 현재까지도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고, 문화적, 사회적 악영향과 친일파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일본은 제국의 수도를 경기도 용인시 근처로 옮기려 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일본 본토는 지진이 많고, 일본 제국의 영토를 고려했을 때 조선의 경기도가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계획은 태평양 전쟁의 패배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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